
스바라시(すばらしい)
골프 내기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골프채 흘리는 것도 몰랐다.
고요한 어둠이 골프장에 슬그머니 자리잡고,
이러다 가는 라이트도 없는데
마지막 홀은 건너 뛰어야 할 것 같아
우리들은 스스로 뛰어다녔는데
아뿔싸 17번 홀에서 어프러치를 하려니까
56도와 52도가 없었다.
뒷팀에 전화해도 없다고 하는데
분명 16번 홀에서 어프러치한 기억이 떠올라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트를 돌려서
16번 홀 그린 주위를 열심히 찾아봤지만
까마귀 소리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골프장에서 만난 서늘한 정적에
카트를 돌렸지만 있어야 할 곳에 없다는 것이
납득이 안되었다.
끝나고 진행요원에게 요청하기로 하고
앞팀을 쫒아가는데 전화가 왔다.
누군가 내 어프러치 2개를 자기 일행의 채인 줄 알고
잘 모셔놓고 뒤늦게 발견한 것 같았다.
일본은 캐디없이 라운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누군가 채를 챙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명문 골프장은
리모콘으로 카트를 움직일 수 있지만
우리가 찾은 후지오노(富土小野 Fuji Oono Golf Club)cc는
중급 정도의 골프장이었고
리모컨없이 카트를 직접 운전할 수 밖에 없었다
16번 홀 근처에서 어프러치를 하고
혼자 Par 찬스를 놓쳐서 겁나게 아쉬워했기에
그 안쓰러움에 채를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 18홀 티박스로 갔지만
동반자들은
티박스에도, 페어웨이에도 없었고
드라이버만 가져갔는데 그린 위에 올라가 있었다.
Par3 백티(Back Tee)가 190미터라서
드라이버로 티샷을 하고
드라이버로 어프러치를 하고
드라이버로 퍼팅까지 겸한 뒤
셋이서 승부를 결정했다고 해서
나는 17홀을 패스하고,
18홀에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만 했다.
세컨 샷이 그린 위에 올라갔지만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그린에 온이 되었지만 너무 멀어 내 공은 홍길동이었다.
속으로 18미터 버디 찬스를 놓친다 해도
세명이 보기 펏이니
Par만 해도 배판이 될 것이기에
어느 정도 잃은 돈을 회복할 것 같았서
홀 근처에 붙이는 작전을 썼다.
오르막이라 힘차게 공을 때렸는데
공은 깃대 오른 쪽으로 너무 세게 가기에
속으로 버디는 커녕 보기도 못할 것 같았는데
아뿔싸 공이 힘이 빠졌는지
홀로 빨려들어갔다.
스바라시(すばらしい)!!!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일본어에 깜짝 놀랬다.
2번의 버디 기회를 놓치고
마지막 홀에서 버디(Birdie)를 했다는,
그것도 지나칠 것 같았는데
빨려 들어가는 공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렸다.
버디 한방에 17번 홀까지 잃은 것을 만회하고
조금이지만 수확을 거둘 수 있었기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나 보다.
먹는 것, 자는 것, 마시는 것
어느 하나 만족할 수 없었던
오사카(고베) 졸업여행 때문에
동반한 원우들에게 참 미안했는데
2일 차에 개운하게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어서
혼자만 좋아했다.

오사카 간사이 엑스포는
씁쓸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말았다.
2년 전,
가족 여행으로 오사카와 교토를 찾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교토의 작은 료칸에서 목욕을 마치고
앙증스러운 흡연장에 붙어있는 엑스포 포스터를 보고
기회가 되면 최고위과정 커리큘럼에 반영하겠다고 한 뒤
잊었는데....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로
어쩌면 마지막 엑스포가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스스로 엑스포 주최자가 된 것 처럼
원우 모집 때
"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충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간지러운 문구를 썼다.
5월에 사전답사를 갔었지만
3박4일에 170만원의 예산으로 엑스포를 방문하고,
골프를 2회 라운딩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여행사에 견적만 3번을 받았는데도
정하지 못하다
결국 지인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호텔이 문제였다.
일본은 저녁 8시가 넘으면
여행사 버스가 제재를 받는다고 해서
저녁을 후다닥 먹고 가이드 안내로
고베 포트피아 호텔에 도착했다.
프론트에서 객실 배정을 한참동안 기다렸는데
우리 호텔은 포트피아호텔이 아니고
고베 포트타워 호텔이란다.
버스는 떠나고
택시를 4대나 잡아서
트렁크와 골프채를 정신없이 실을 때만 해도
우리 호텔이 그렇게 꿀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나마 호텔 3층에 온천이 있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이라도 씻으려고
열심히 냉탕 온탕 왔다갔다 한 뒤 머리감고 나왔는데
아뿔싸 수건이 없었다.
옆에 있는 김부장님이
방에서 수건을 갖고 와야 한다고 하는데
수건은 없고, 수건을 대체할 마땅한 것도 없어서
알몸으로 김부장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정말 대략난감 했는데 좀전에 들어간 노대표님에게
먼저 수건을 빌리면 어떻겠냐는 김부장님의 조언에
씻고 있는 노대표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한 뒤
락커를 열어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수건을 내 방에서 갖다 주기로 하고
열심히 말리고 있는데
노대표님이 바로 뒤따라 나와서
작은 수건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쓰던 타월을 건내주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한참동안 과거를 뒤적거렸다.
그런 경우가 있었던가?
재작년 33년 만에 찾은 오사카의
온천 료칸에서도 가운만 입고 들어갔었지
수건을 갖고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참 야릇한 경험을 하고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내일 오사카엑스포 관람 때에는
어떤 난감한 일이 생길까
걱정되는 고베(Kobe)의 밤이었다.
오사카 졸업여행 3일차.
대형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도시락을
각자 고를 때만 해도 비가 안왔는데
엑스포 장이 가까울 수록 빗줄기는 굵어져 갔고
엑스포 서문으로 버스 진입이 어렵다는 소식까지 더해져
엑스포 가는 길은 무거워졌다.
지하철을 타고 40여 분만에 입장한 뒤
빗속을 뚫고
엑스포가 자랑하는 그랜드 링(Grand Ring)에 올라가
파빌리온(Pavilion)만 바라보다 내려와
바닥에 비닐봉투를 깔고 점심을 먹었다.
11명을 2개 조로 나누어 이동을 하였는데
1조는 한국관을 보았지만
2조는 줄서는 인파만 사진으로 남기다 포기하고
고베로 돌아왔다.

오사카(고베) 졸업여행의
마지막 날은
비가 오락가락 했지만
항구 도시로서의 고베(Kobe)의 이국적인 모습을
간직한 채
160여 개의 골프장 중 한국인에게 친숙한
도죠파인밸리cc를 찾았다.

일본 골프장은
가격대로 보면 9900엔에서 15000엔까지
요금에 따라 수준이 정해진다.
다양한 할인폭을 기대하려면
직접 예약을 해야지
여행사와 동행하면 가격은 잊어야 한다.
부드러운 구릉 지대에 넓은 페어웨이로
골린이부터 싱글까지
부담없이 라운딩이 가능하다는 홍보 문구에
녹아나면 안된다.
같은 골프장을 몇 번 가본다면
전략적인 유혹(?)의 의미를 알 수 있겠지만
처음 가는 골프장에서
벙커와 헤저드 숫자 보다는 동반자와의 유쾌한 라운딩에
더 의미를 둔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내기 골프 2차전에서
전반은 주머니가 넉넉했기에
후반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는데
까마귀가 카트에서 무엇인가 가져가 버린 것처럼
드라이버와 우드 그리고 어프러치 중
하나가 홀마다 비었다.
게다가 장단지에 쥐가 나서
주머니가 채워졌다 비어졌다
갈피를 못 잡았다.
결정적으로 Par3에서
신회장이 벙커 뒤에 놓여있는 깃대를 향하여
공략하기에 그래도 되냐고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그린에 올렸다.
눈으로 봐도 5미터 이내에 붙인 것 같았다.
남자가 벙커를 피해 우측을 공략할 수 없어서
과감하게 3번 유틸리티로 티샷을 했는데
벙커 턱을 맞고 주저앉았다.
스고이데스(すごいです)~~~
신회장의 버디(Birdy)에
악착같이 벌어두었던 거금을 다 토해내고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스고이 (すごい)는
스바라시(すばらしい)와 같이
대단하다 혹은 휼륭하다 라는 의미로
상대방을 칭찬할 때 쓰이지만
스고이 (すごい)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스고이(凄い)의 한자가 차가울 처(凄)를 쓰는데
아내 처 옆에 얼름 빙변이 붙어서
얼음같이 차가운 아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쓰라린 마음을 안고
고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만난
무채색의 지붕들을 보면서
일본은
화려하기 보다는 절제(節制)가 되어 있는,
보이는 것보다 그 내면에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