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암대회

시월의 마지막 날,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재생하면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산에서 여주까지
2시간 만에 찾은 골프장은
진입로에 가을 대신 행사 배너가
상큼하게 환영하고 있었다.
프로암(Pro-am)이란
프로페셔널-아마추어의 줄임말로,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가 함께 경쟁하는 대회에서
함께 플레이하는 라운드를 말한다.
흔히 주최 측에서
자기 회사의 VIP 고객을 초청해
대회에 참가한 프로 선수들과 라운드를 하고,
만찬도 함께하는 교류 행사로 볼 수 있는데
아마추어 골퍼의 입장에서는
프로 선수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선수나 프로골프협회에서는
기업인 또는 사회 저명인사와 관계를 맺고
스폰서를 유지하거나 확대 하는 등 좋은 기회가 되는 행사인데
한번도
초대받지 못했고
한번도
참가한 적 없어서
그들만의 행사라고 생각하던 차에
모 카드사의 프로암대회에 초대받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연간 일정이
평균 18개 정도이니
프로암대회 참가 아마추어가 대략 54명이 참가하게 되고,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PGA)
골프투어 30개까지 합하면
연간 150여명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청받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초대받게 된 프로암대회는
KPGA나 KLPGA 주최한 프로골프대회가 아니고
주최 측에서 고객사를 대상으로
참가인원을 모집해서 실행하는
인비테이션 셀럽 프로암대회였다.
골프에 진정이라면
TV에서만 보던 프로 골퍼와의 라운딩에
설레여서 잠이 안오겠지만
내일 아침 교통 상황을 감안해 출발 시간을 체크하는
나에게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을은
시월의 마지막 날인지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다가
바라보는 풍경(風景) 속에서 거닐고
노란 모과처럼 매달려 있었다.
혹시 늦을까봐
최단 거리를 찾아서 요리조리 졸음을 깨우며
온 덕에 행사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하였다.
입구부터 도우미들의 환영 세레모니를 받고
락커에 들어섰는데
락커에 이름 석 자가 씨익 웃고 있었다.
락커 문을 열자
골프모자에 우산 그리고 선물보따리가
눈에 가득찼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포장을 벗기고 살펴보고 달아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30분을 소비하였다.
프론트 앞 로비는
젊은 골퍼들의 웃음소리로 꽉 차 있고
기념 샷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데
초대받은 파티에
혼자 술잔을 들고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MZ들이 골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자기만의 숏폼(Short-form)으로 SNS에 올리다가
일부는 테린이가 되어 빠져 나가고
일부는 프로야구 관중석을 채웠다고 들었는데
오늘 개최되는
한화 이글스와 LG트윈스의 한국 시리즈 5차전과는
상관없는 지 골프장을 채우고
스타트 광장은 락 페스티발에 온 것 같았다.
내가 아는 프로암대회는
주최 측의 스폰서가 초대하는 고객이다 보니
나름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시니어들이
가을에 맞추어 뻐끈한 몸을 풀고 있어야 하는데
인비테이션 셀럽 프로암대회는
셀럽(Celebrity)이란 단어가 붙어서인가
참가하는 아마추어들 모두가
어찌 그리도 늘씬하고 패션어블한지
눈을 둘 곳이 없어 애꿏은 담배만 피우며
카트에 매달린 풍선이
풀려서
하늘로 올라가길 기다렸다.
정해진 테이블 위에,
정해진 네임텍에 앉아
아침 겸 점심을 주문할 때 즈음
한 명씩 한 명씩 들어오는 여자 프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실력과 외모를 갖춘 여자 프로 골퍼와의
라운드 기회를 선호하는 프로암 대회의 속성 상
팀별로 여자 프로가 배정되는 줄 알았는데
간혹 남자 프로가 배정된 팀도 있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빈 자리를 바라보았다.
사전에 배정된 팀 명단에 여자 프로 이름이 있었지만
혹시 변경될까봐....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는,
우리 팀의 여자 프로는
일대일로 원포인트 레슨을 하려는 듯
170이 넘는 큰 키로
티박스를 지키고 있는 바람에
송회장님의 티샷은 쪼루가 나버렸다.

이 분위기라면
나 역시도 슬라이스가 나든가 훅이 날 것 같았는데
여지없이 왼쪽으로 가다가 나무를 맞고
살았다.
목생도사(木生道死) 라고
첫 홀은 어찌 어찌 넘어갔지만
18홀을 어떻게 라운딩할 것인지 막막했다.
자유컨트리클럽에는 자유Freedom)가 없었다.
표기도 자유(JaYu)컨트리클럽으로 해놔서
고루한 느낌을 주지만
찌들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넓게 펼쳐진 페어웨이 속으로 걸으면서
독특한 개성을 간직한 코스를 따라
계절이 연출하는 꽃의 향연을 만끽하는 자유로움.
진정 소중한 추억의 공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코스 곳곳에 자유가 묻어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다행스럽게 여자 프로가 동반자인 안상무를
밀착 레슨하는 바람에
홀을 거듭할 수록 몸을 풀고
짧은 드라이버 거리를 우드로 커버한 뒤
나의 장점인 어프러치로 홀을 하나 씩
지나쳐갔다.
큰 키에
야윈 몸매로
드라이버가 최소 180미터 정도 나가는 이프로를
바라보면서
문득 처음 머리올렸던 구파발 123가 생각났다.
어리버리한 상태로
앞 팀의 여고생이 360도 원을 그리면서
아이언으로 공을 때릴 때만 해도
그림 같다고 생각했지
힘들이지 않고, 채의 무게로 공을 멀리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다.
온 몸을 비틀고 두 다리는 벌어져도
조금 더 멀리 갈려고
우악스럽게 공을 향해 질주하다가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협착증에 어깨 통증이 오면서
우아하게 날아가 벌처럼 공을 칠 수는 없을까
고민이 많았지만
여전히 골프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드라이버로 공을 보내면
멀리 날아가는 것 같은데
페어웨이에 가면 내 공이 없어서
캐디랑 한참을 찾다보면 50미터 뒤에 공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동반자에게 물어보면
공에 힘이 없어서
중간에 뚝 떨어지고 그러다보니 런도 없어서
거리에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했지만
힘을 주면 훅이 나고
힘을 뺴면 슬라이스가 나길래
드라이버는 영원한 숙제였다.
그래서
흔들리는 모습을 들킬까봐
여자 프로가 옆에 오면 신경이 쓰였는데
거리보다는
그럭저럭 공을 잘 맞추어서 잘 넘어갔다.
단 하나 어프러치를 할 때
채를 너무 사선으로 눕히지 말고
세워서 편하게 내 보내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방향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스핀을 먹일려고 공을 때리다보면
어프러치가 끝에 가서
휘거나 꺽이는 데
그런 현상이 사라졌다.
늙은 낙엽이 어깨를 툭치면
가을 햇살에 얼굴을 맡기며
흐믓한 미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프로암대회는
나의 장점인 어프러치를 향상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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