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스톤 이천cc
제주도의 명문 나인브릿지와 블랙스톤이 경기도에 자매 브랜드를 오픈했다. 블랙스톤 이천cc는 2008년 4월에 오픈을 하였고, 해슬리 나인브릿지는 2009년 9월에 오픈하면서 수도권에 품격있는 골프장 전성시대를 열었다. 문제는 회원권이 없는 나로서는 참 난감했다. 지금도 명문 골프장을 갔다온 골퍼들을 보면 신기하게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도대체 비결이 뭘까? 궁금했다. 구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했지만 라운딩 경험이 증가할 수록 명문 골프장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기에 부킹은 참 불편한 것 같았다. 지금은 MZ세대들의 골프장 습격이 보편화되었고, 회원권 구입 방법도 다양해졌으며 소득이 높아졌기에 명문 골프장을 갔다온 골퍼들이 눈에 띄게 많았지만 15년 전에는 정말 엄두가 안났다. 오죽하면 명문 골프장을 가려고 카페를 기웃거리고, 가고 싶은 골프장을 버킷리스트로 올려놓고 밥먹을 때마 한번 씩 바라보았을까?
개인적으로 호시탐탐 노렸지만 생각만큼 부킹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애쓰다가 먼저 블랙스톤 이천cc가 내 안에 들어왔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주인공 이동건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한 명대사 " 내 안에 너 있다" 처럼 내 안에 블랙스톤 이천cc가 2011년 5월 6일에 찾아왔다.
왔노라, 보았노라, 잊었노라
좁은 진입로에 PGA발렌타인 골프대회가 개최된 곳이란 사인(Sign)이 없었다면 그저 덤덤할 정도의 느낌을 주는 골프장인데
클럽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탁트인 로비와 높은 천고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의 성처럼 감성이 물씬 베어있는 분위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행복했노라 라고 여행 후기를 적다가 마지막을 먹었노라 라고 바꾸는 경우는 있지만 블랙스톤 이천cc 클럽하우스의 웅장한 분위기 때문에 라운딩하러 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긴 처음이었다. 특히 락커룸 들어가기 전에 야자수로 꾸며진 정원의 분위기는 일품이었고, 식사 후 문을 열고 바라본 골프장 페어웨이는 꽃잔듸가 한눈에 봄을 알렸다. 페어웨이와 바로 인접해서 꽃잔듸를 심는 것이 상당한 난이도가 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지만....

스타트 홀 옆 연습 그린에는 블루마운틴 색상의 연습공이 그린색의 잔듸와 어울려 시야를 잡고, 카트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검은 색 티 역시 블랙스톤 이천cc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고객들에게 표현해주었다. 600억짜리 클럽하우스와 락커룸의 세심한 잠금장치, 연습그린의 칼러풀한 공 배치로 이어지는 고객에 대한 배려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블랙스톤의 양잔듸는 너무 시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PGA시합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페어웨이 상태는 아주 양호했고, 그린 속도는 앙탈스러웠다. 27홀이다보니 통기 (aeration) 작업도 피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골퍼의 실력이었다.
오늘은 동코스가 에어레이션을 하는 바람 북코스에서 서코스로 라운딩을 하게 되었다. 첫홀에 우연잖게 버디 찬스를 맞이하고, 두번 째 홀 역시 파 찬스를 맞다보니 오늘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흥분도 가졌는데, 그린 속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퍼팅에 몇 번 실패하더니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스탠스가 흔들려 드라이버가 난조를 보였다. 게다가 양잔듸 특유의 확트인 시야 때문에 웬지 멀어보이는 거리감도 낮은 스코어에 일조를 하였다. 특히 티박스에서 올려다보면 벙커가 위협적으로 배치되어있지만 그린에서 티박스를 보면 벙커가 보이지 않는 매직홀 역시 나로 하여금 백돌이가 되게 만들었다. 블랙스톤 이천cc 후기를 읽어보면 모두가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골프장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데 나 역시도 몹시 공감이 되었다. 18홀 내내 2단 그린은 기본이고, 그린 안에 그린이 존재하는 황당함도 맛보게 하였고, 페어웨이 역시 언둘레이션(Undulation) 심해서 공의 위치에 따라 방향 잡기가 어려웠다. 귀신풀로 이루어진 깊은 러프은 덤이었다.
조폭게임의 맛은 16홀과 17홀 그리고 18홀에서의 역전승부인데 망가진 골프실력으로 버디를 잡을 수가 있을까? 너무 버거워서 고민하다 맞이한 서코스 마지막 홀. Par5 롱홀에서 티샷이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컨드 샷이 잘 안착하여 쓰린 온이 가능할 정도의 위치에서 7번 아이언으로 공략했는데 그린을 벗어났다. 깃대와 나의 볼과의 거리는 9미터 정도. 내리막 경사에 에이프런(Apron) 이 1미터. 여기서 버디를 하면 17홀 내내 선두를 유지한 정교수의 게임머니를 다 뺏어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행인지 철옹성같았던 정교수가 세컨 샷에 뒷 땅이 나고, 어프러치가 그린을 벗어나고 말았다.
회심의 일격.
여지껏 퍼팅이 약해서 넣지 못한 것을 만회하고자 모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퍼팅한 탓인지 다소 세어서 아뿔샤 깃대를 맞고 흘러버렸다. 1.3미터 정도 벗어난 Par 퍼팅을 바라보면서 아쉬음에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는 데 멀리건(mulligan) 받은 오교수가 자기가 넣으면 파(Par)라고 했다. Par면 먹지는 못하고 비기게 되는데, 그러면 어쩌지?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선두를 유지한 정교수가 더블보기를 해서 24만원의 1/2인 12만원을 토하고, 남은 17만원을 합쳐서 오교수와 내가 순위를 결정해야 했다. 먹지는 못하지만 비길 수는 있다. 오교수의 괴팍한 멀리건 때문에 확실한 1등도 2등도 판가름할 수 없어서 결국 오교수와 무승부로 하고, 점심을 내가 사기로 했는데 소고기를 먹는 바람에 엄청 손해를 보았다.
PGA발렌타인 골프대회에서 어니얼스와 양용은이 예선 탈락하고, 세계 랭킹 1위인 리 웨스트우드가 역전 우승을 한 골프장. "가보고 싶은 곳을 넘어서 머물고 싶은 곳으로 남고 싶은" 블랙스톤 이천cc의 슬로건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랬다.
15년 전, 블랙스톤 이천cc를 갔다온 뒤로 그 해 5월에 제주도 블랙스톤cc를 간다고 했는데 후기가 없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다만 제주 블랙스톤cc는 주위에 농장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나서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6월에 분명 복수혈전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간 것 같기도 하고, 안 간 것 같기도 하고... 해슬리 나인브릿지는 서너 번 가다보니 추억이 많은데 블랙스톤 이천cc는 왜, 없을까 하다가 무릎을 쳤다.
우리들은 매년 최고위과정 워크숍을 제천에서 개최한다. 첫 날 오전에 충주의 킹스데일GC나 동촌cc 혹은 대영힐스cc에서 라운딩을 한 뒤 호반길을 따라 월악산 자락에 있는 하늘계곡연수펜션을 찾는다. 2024년 8월31일에도 1박2일로 원우들 간에 단합을 하는데 9월1일에 블랙스톤 이천cc를 예약해서 갔었다.
왜, 기억이 나지 않았을까?
전 날 술에 취해서? 아니면 잠을 못자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방문해서 일까? 블랙스톤 이천cc 앞에서 해장국에 계란 후라이를 먹고, ‘KB금융 스타챔피언십’ 행사 깃발이 휘날리던 진입로를 들어섰던 기억은 생생했다. 행사 준비 때문에 주차장을 폐쇄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유도하는 바람에 대리석으로 빗어진 웅장한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나?
15년 전에 방문한 블랙스톤 이천cc는 정말 어렵게 부탁을 해서 라운딩을 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덤덤하게 다른 원우들 몰래 4명이 라운딩하는 것이라 입조심을 하는 바람에 머리 속에 별도로 저장된 것 같았다.

블랙스톤의 양잔듸는 너무 엉망이었다.
2024년 9월5일~9월8일까지 개최되는 ‘KB금융 스타챔피언십’ 행사가 코 앞인데 엄청난 디봇은 폭탄맞은 듯 흙을 드러내고, 잔듸는 물러서 흐믈거리고 도저히 명문 골프장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환불받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나마 북코스의 조선잔듸가 위로해주어서 라운딩을 마칠 수 있었다.
북코스 8번 째 홀은 호수를 감싸고 곳곳에 벙커를 품에 안은 좌 도그렉(Dogleg)홀인데 거리만 나면 정말 도전해 볼만한 홀인데
아쉬웠다.
2024년을 기점으로 많은 골프장들이 이상 기후를 감안해 대대적인 잔디 교체에 나섰다고 한다. 여주 아리지cc와 이포cc 등도 더 이상 기후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교체를 했고, 블랙스톤 이천cc도 골프장을 살리기 위해서 한국형 중지로 바꾸기로 했다. 9홀씩 차례로 폐장해 27홀 3개 코스 전체 페어웨이와 러프를 교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60억원이 넘는다고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투자는 꼭 필요한 것 같았다.
나 역시도 한국형 잔디인 중지를 좋아한다. 공이 잔디에 약간 떠 있어 쓸어 치기에 적당해 뒤땅(Fat shot)이나 토핑(Topping)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잔디, 들잔디 같은 한국형 잔듸는 고온 다습한 여름에 강해서 많은 골프장에서 사용하는데 금잔디는 가늘고 추위에 약해 해남 파인비치cc 같은 남쪽 골프장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양탄자 같이 부드러운 서양 잔디에 비해 한국형 잔듸는 그림 같지 않지만 꼿꼿해 공을 떠받치는 힘이 좋고, 밟아도 잘 견딘다.
이상 고온 현상이 심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양잔듸 골프장을 볼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베어크리크 춘천cc와 트리니트클럽cc가 더욱 그리워진다.
봄이 와도 꽃잔듸와 양잔듸가 만나는 블랙스톤 이천cc의 아름다움은 마음 속에서만 간직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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