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골프

중동전쟁이 발생할 지도 모르고 이집트 여행을 다녀온 뒤 십 여일 동안 잔뜩 밀린 신문을 읽다가 사회면 하단에 <사기골프>에 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20여년 전과 다르게 필드에서 사기가 아니라 스크린 골프에서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에 깜짝 놀랬다. 약물류를 이용하는 방법은 같지만 탁트인 필드가 아니고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도 사기가 가능하다니 뒷 골이 서늘해졌다. '골프 내기'를 이용한 사기 골프는 처음 만나자 마자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나서 친해진 뒤 약물이나 여성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딱 한번 만난 뒤 그 뒤로 연락을 끊어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꼭 일주일 전이었다.
중부 만남의 광장에서 천안 IMG내셔날cc(IMG내셔날cc는 국내 골프장 중에서 무려 7번까지 이름을 바꾼 곳이었다. 외국의 명문 골프장들은 수백년을 이어가지만 IMG내셔날cc는 너무 자주 바뀐다. 1994년, 미송cc로 출발해서 이글cc, 엑스포cc를 거쳐 프레야충남cc, IMG내셔널cc, 에머슨내셔널cc로 변경되더니 세종시 출범과 함께 세종에머슨cc로 변경되었다)를 가고자 동반자를 기다리는 사이에 따스한 다방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자판기로 가서 커피를 뽑는데 갑자기 두 명의 남자가 나나타서 아는 척을 했다
졸음이 덜 깨긴 했어도 낯선 사람들이 아주 촌스런(?) 복장으로 라운딩 가시냐, 자기들은 보기플레이는 잘치시는 것 같다 등등 처음 보는 데도 좋은 말로 칭찬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나도 모르게 이것 저것 술술 다 이야기하고, 명함도 주고 받았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자기 선배 중에 하나가 송추 회원권을 고 있으니 날잡아서 같이 라운딩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반자인 이교수님이 옆에서 들었는지 정말 갈거냐고 물었다. 새벽 바람에 등골이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올 해는 낯선 사람들과 참 많이도 라운딩을 한 탓인지 적대감은 없었지만 요근래 유행하는 사기골프단이 떠올라 속으로 걱정도 좀 되었다.
5시 30분에 만나서 경부선을 타고 IMG내셔날cc에 7시에 도착하여 식사도 하고 현지에서 조인한 실사공장 회장 및 관계자와 면담도 하면서 넉넉한 시간을 달랜 덕인지 새벽의 골프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라운딩 끝나고, 식사도 하고, 공장 견학도 한 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눈이 반은 감겨서 조수석에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엄청 졸았다. 오산을 지나 신갈 쯤, 한숨 늘어지게 잔 덕분에 피로가 싹 가시기도 했지만 모르는 전화로 인하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에 중부 만남의 광장에서 만난 안병욱입니다." 라는 소리에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깜작 놀라 대답을 했지만 참 난감했다.
내 뒷좌석에서 어쩔려고 약속을 하는 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교수님을 생각해서 부킹 약속을 취소할까도 싶었지만 아직 일주일이란 시간이 있으니 좀 지켜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 뒤로 컨퍼런스 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보낸 탓인지 잠시 잊어버렸지만 중고차를 해외에 판매하는 안병욱사장은 두 번인가 전화가 와서 잊어버린 약속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약속한 하루 전 날에 워낙 중요한 컨퍼런스가 있어서 핸드폰에 입력만 시켜놓고
골프약속이니 가게되면 가야지 하는 심정으로 지냈다. 컨퍼런스는 우여곡절 끝에 스트레스를 잔뜩 안겨주고 끝났고, 쉴 틈도 없이 저녁에는 기제사로 인하여 오산까지 갔다와야 했다.
의정부시청에서 5시 30분에 만나서 같이 가자고 했기에 새벽 4시40분 모닝콜을 맞추어놓고, 새벽 1시가 다 되어서 잠이 들었다. 분명 모닝콜 소리를 들었는데 그리고 무의식 중에 뭔가를 확인했는데 다시 잠이 들었는지 손에 잡고 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면서 벌떡 일어나 보니 강사장이 어디쯤이냐고 묻는다. 나원참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나보다. 지금 출발한다고 하고서 시간을 보니 5시 30분, 앞으로 2시간 안에 가평 베네스트cc를 가야 했다. 북부간선도로 구리IC까지 30분, 베어스타운 지나 신팔사거리까지 30분, 거기서 가평까지 30분, 가능할 것 같아서 양말도 챙기지 못한 채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6시가 넘어서 그런지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차가 많았다. 화물차 사이에 끼어서, 신호대기도 하면서 왜, 내가 이런 무모한 약속을 잡아서 이 고생을 할까 싶기도 했다.
북부간선도로 구리시를 지날 즈음 강사장으로 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가평 베네스트GC인지 알았는데 가평의 썬힐GC라고 한다. 기가 막혔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서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약속이기에 참았는데...처음에는 송추cc나 한양cc를 잡기로 했는데 가평 베네스트GC로 변경되었다고 해서 꾸욱 참고 여기까지 왔는데 막판에 썬힐GC라고 하니 황당했다.
화가 났다.
뭐 이런 무례한 인간이 있나 싶어서 핸들을 돌리까 하다가 여기는 바가 그쳤지만 그 쪽 운악산 쪽은 비가 올지도 모르니 비가 오면 회차하기로 맘을 먹고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비까지 맞으면서 초보 때 하도 많이 다녀서 지긋지긋한 썬힐GC를 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썬힐GC는 산 정상을 기준으로 썬코스와 밸리코스 그리고 파인코스와 힐코스가 배치되었는데 일단은 진행을 너무 재촉하는 곳이기에 라운딩하러 온 것인지, 골프장 측의 순서에 우리가 맞추어 끝내야 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로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금년 봄, 가평 베네스트GC에서 모임이 있었으나 업무상 빠질 수 없는 라운딩과 중복이 되어서 가평 베네스트GC이 소개해 준 썬힐GC는 여전히 진행을 재촉하였지만 그린은 참 빨라졌다. 하지만 여름에 지인들과 찾은 썬힐GC는 그린 상태가 너무 안좋아서 실망스러웠다. 캐디 말로는 성수기 7,8,9월에는 한 달에 5,6백만원 씩 돈을 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골퍼들은 받아서, 얼마나 많이 회전을 시키는지 알 것 같았다. 골프장 그린(Green) 상태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당시만 해도 베스트 캐디 피가 9만원인데 하루에 2바퀴 돌면 18만원이고, 한 달 내내 돈다고 하면 18만원 곱하기 30일이면 5백 4십만 원이 되는 데 캐디피를 액면 그대로 캐디가 가져가는 것은 아닐테고 한 달 내내 쉬지않고 뛸 수도 없기에 성수기에는 캐디가 하루에 3번을 라운딩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휴, 슬픈 한국의 골프장. 저녁 라이트까지 가동하면서 엄청 벌어들이고 골프장의 상태는 그때 그때 해결하면 된다는 경영실태를 어찌 고칠 수가 있을까? 답답했지만 오늘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7시 26분이 티업 시간에 맞추고자 엄청 서두른 탓인지 티박스에 도착하니 내 차례가 되었다. 얼결에 인사를 했지만 한 명은 여성이라고 들었는데 다 시커만 남자였다. 며칠 전도 아니고 당일 날 가평베네스트GC를 썬힐GC라고 속이고, 이번엔 동반자 중 한 명이 여성이라고 하더만 새벽부터 어딜 골프치러 가냐고 해서 못왔다고 핑계를 대고 대신 친구가 왔다고 한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지 난감했다. 아무리 휴게소에서 만난 사이지만 운동을 미끼로 엄청난 사기를 칠 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는데, 게다가 동반자 중 한 명이 여성이라고 해서 설마 여성이 낀 사기도박단은 아니겠지 했는데 영 느낌이 안좋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골프장에 풀뱀(골프를 잘치는 여성를 지칭)이 있는지도 몰랐다.
첫 홀의 티샷이 훅이 나서 왼 쪽으로 꺽였다. 도로를 맞아 않아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 페어웨이에 안착했고, Par5라서 무리하지 않게 세컨 샷은 5번 우드로 툭쳤다. 잘맞아아서 135야드를 남겨놓고 버디까지 노려볼 정도였다. 하지만 셔드샷은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고 가볍게 친 것이 잘 맞아서 그린을 맞고 오버를 했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그린으로 걸어가는데 강사장은 벙커에서 올린 어프러치가 홀에 붙어서 오케이 받고 파를 하게 되었고, 나는 벙커에서 탈출을 너무 멀리하는 바람에 보기가 되었다. 다른 2명의 사장 중 한 명은 3온에 2펏, 또 한 명은 4온에 원 펏을 하여서 결과적으로 투 파 투 보기가 되었다.
문제는 첫 홀 세컨 샷 하기 직전에 강사장이 그냥 치면 심심하다고 뭔가 내기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몇 치냐고 묻길래 80 후반에서 90초반이라고 했더니 자기랑 같이 스크라치를 하고, 동반한 두 분의 사장에게 우리한테 핸디를 4개씩 주라고 해서 졸지에 4만원씩 8만원을 받게되었다. 그렇다면 타당 5천원,만원이 아니라 만원, 이만원이란 것인데, 받기는 받았지만 대략 난감하였다. 어찌 거절할 명분이나 시간을 가질 틈도 없이 낯선 사람들과 라운딩 중에 내기를 하게 되다니...게다가 강사장은 첫 홀에서 벙커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나 퍼팅하는 폼이 너무 부드러워서 정말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식당에서 나이가 54살이라고 밝힌 김사장은 드라이버 치는 폼은 세련되지 못하였지만 쭉 뻗는 것이 80대 중반 같았고, 여성 골퍼 대신 참가한 황사장은 빨간색 울쉐터를 입은 탓인지 깡마른 체격 때문에 58년 개띠처럼 보였는데 63년 토끼띠라고 하면서 나의 판단력을 흐려놓았다.
지난 주, 남양주 해비치cc에서 스크라치를 할 때 이상하게 짧은 퍼팅이 안들어가서 싱글에서 백돌이로 전락했는데 낯선 사람들과 스트록을 한다? 걱정이 앞섰다. 첫 홀에서 2만원을 내어주면서 불안이 서너 개씩 몰려왔다. 보기플레이라는 강사장의 티샷이 멋지게 중원을 가로지어갔고, 김사장은 첫 홀과 다르게 오른 쪽 헤저드에 티샷을 빠트렸다. 잘쳐도 걱정, 못쳐도 걱정이 되었다. 잘치면 보기플레이가 싱글같아 보였고 못치면 나에게 뭔가 미끼를 던져 주는 것 같아서 헷갈렸다. 첫 홀은 보기, 두번 째 홀도 보기, 세번 째 홀도 보기를 했는데 내 주머니에는 12만원이 생겼다. 처음에 8만원을 핸디로 받았으니 4만원을 딴 셈이었다.
네번 째 홀 Par3에서는 나만 보기를 하고, 한 명은 더블 보기, 나머지 두 명은 쓰리플이었다. 잘치던 티샷이 훅이나서 언덕 아래로 굴러가게 한다든지, 세컨 샷을 뒷 땅을 친다든지 뭔가 석연치않게 3명이 라운딩을 펼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작부터 배가 살살 아파서 캐디에게 그늘집을 물었지만 불안해서 발걸음이 잘 안떨어졌다. 내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에 혹시 셋이서 캐디를 구어삶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뭔가 작당을 꾀하지 않을까 싶어 화장실을 가지 못한 채 라운딩을 진행하였다.
전반에서 가장 긴 Par 4이자 핸디캡 1인 7번 홀에서 드디어 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티샷할 때 동반자들이 웃겨서 잠시 한눈 파는 바람에 티샷이 쪼루가 났고, 세컨드 샷은 언덕에 올라가고 말았다. 4온에 2퍼팅하여 더블보기를 기록했는데 중고차 강사장이 자칭 쓰리플 보기라고 한다.
이상했다.
썬힐이 예전에는 OB말뚝이 심하게 많이 있었지만 진행 상 부담을 주는 지 아니면 경영상 이유인지 OB말뚝을 헤저드 말뚝으로 많이 대치를 했고, 7번 홀 역시 그린 옆의 낭떨어지가 헤저드이기에 굳이 내려가서 칠 필요가 없는데 강사장은 내려가서 퍼올렸고, 그린에 안착했다. 그렇다면 세컨에서 한번 퍼덕거린 것까지 해서 4온인데 어찌 5온이라고 하고, 1미터 남은 것도 오케이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퍼팅을 하고 못넣는 것일까? 아주 의도적으로 쓰리플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전반 마지막 홀은 평판이었는데 티박스에 도착해서 중고차 남사장이 부득부득 우기면서 자기 직권으로 배판을 부르겠다고 하길래 뭐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악명 높은 개미허리의 Par 5 홀이었다. 초보 때부터 하도 이 홀에서 혼쭐이 났기에 오늘은 숙연하게 맞이하였다. 덕분에 티샷이 왼 쪽으로 쏠렸지만 언덕에 자리잡았고 나란히 붙은 김사장이 먼저 OB를 내었다. 그래서 난 욕심없이 레이아웃하듯 클리브랜드 하이브리드 채로 툭 쳐서 135야드 앞에 갔다 놓았다. 쓰리온인 줄 알았는데 조금 짧아서 에이프런(Apron)에 놓여있었고, 어프로치를 부쳐서 마지막 홀도 Par를 하였다.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목에 힘주고, 평판을 배판으로 우기던 남사장은 더블보기를 했고 내 앞에서 OB를 낸 강사장은 쓰리블보기를, 유일하게 표정없이 침착하게 라운딩하는 황사장은 보기를 해서 내가 마지막 홀에서만 12만원을 걷어들였다.
긴장을 많이 하였는지 잔반을 끝내고 나니 피곤했다. 만두국을 먹으면서 후반을 어찌 할 것인가 고민했다 일단은 썬힐GC의 힐코스가 상당하게 부드러운 코스이고, 거리도 그다지 긴 편이 아니기에 침착하기만 한다면 궁지에 몰린 형편을 아닐 것 같았다. 다만
동반자들이 언제 배판에 배판을 부를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내 수중에는 핸디로 받은 8만원을 포함해서 근 30만원 정도가 쌓여있었다. 따당을 부르고, 내가 OB가 나서 양파가 된다고 가정을 했을 때 한 홀에 최대한 많이 잃을 수 있는 금액은 대략 40만원에서 50만원 정도이니까 지금 상태로라면 한 판 정도는 버틸 수 있지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동반자들이 요구하더라도 후반에는 최대한 더블배판을 없애고, 불가피하다면 배판만 한 두판 정도 인정하기로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렸다.
후반이 시작하자마자 남사장이 전반에 자기가 많이 잃어서 만회하고자 따당을 부르겠다고 한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좀더 빠르게 제안이 왔지만 냉정하게 거절을 했다. 내 표정이 굳어서인지 중고차 강사장도 호응을 해주었고 후반 첫 홀은 2파2보기였다.
2번 째 홀부터는 내가 티샷할 때마다 너무 정확하게 페어웨이에 안착을 한다고 동반자들이 혀를 차지만 내가 보기엔 자기들이 생각한 작전이 잘 안 먹혀 들어간다는 탄식같이 들렸다.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그래도 난 짤순이라서" 라고 한마디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게다가 롱홀에서 OB가 난 사람이 있으면 나는 쓰리 온을 한 뒤에도 어김없이 쓰리 퍼팅해서 그들로 하여금 따당을 부르게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을 모두 배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후반을 모두 배판으로 받아들였지만 최선을 다해서 또박또박 치다보니 오히려 그들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예상대로라면 그들 셋이서 보기를 하고 내가 파를 하면 더블배판이 되어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같이 보기를 하니까 아주 혼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중고차 강사장이 "나중엔 따면 잃은 사람에게 돌려주기" 라는 희안한 제안을 라운딩 도중에 슬금슬금 흘리고 다녔다. 나도 굳이 그들의 돈을 따고 싶지 않기에 실수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스코어를 지키고자 애썼다.
맥주 한 잔 하라고 하면 한잔 했고, 농담을 하면 농담도 받아주었다. 후반 3홀을 남겨놓게 되었다. Par 5 , Par3, Par 4. 위 세 홀 중에서 분명 한 홀은 따당을 요청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표정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먼저 중고차 강사장이 이글을 할 것 같은 분위기로 티샷을 했지만 쪼루가 났다. 작전대로라면 이 상황에서 더블보기든 쓰리플 보기를 해서 그 다음 판에 더블배판을 부르는 것이 원칙인데 이해안되게 자기가 주최자라고 멀리건을 요청했다.
이제 2홀 남았다. Par3에서 앞선 3명이 그린 쪽으로 아주 잘 갔고, 내 볼은 왼 쪽으로 휘면서 안보여서 캐디가 잠정구를 치라고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 싶어 잠정구를 그린 위에 잘 올린 뒤 가보니 처음 친 공은 도로에 맞고 언덕에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지막 홀에서도 중고차 강사장이 뒷 땅을 두번 씩이나 치고, 난 투온에 버디 한 번 해서 이 괘씸한 동반자들을 혼내줄까 싶어 신경써서 퍼팅을 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섞인 옆 경사를 잘 읽지 못해서 보기를 하고 말았는데 중고차 강사장이 손을 드는 바람에 마지막 홀은 정산없이 흐지부지 되었다.
끝나고 주머니의 잔고를 헤아리니 22만원이 남아있었다. 수표 한 장을 캐디에게 주니 9만원 이상은 못 받는다고 해서 현금으로 9만원을 주고나니 13만원이 남았다. 라운딩 후 식사를 할 때 내가 식사비를 내면 될 것 같았다. 샤워 후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식사할 것을 제안했는데 남사장 옆에 낯선 사람이 있었다. 아는 사람인데 우연하게 만났다는 것이다. 나원참, 그럼 그 쪽 동반자들하고 식사를 하면 되지 왜 우리들을 따라나서는지 이상했다. 중고차 강사장이 앞장서고, 한참 지나다 길 건너편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마치 하우스처럼 원탁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엔 화투가 부담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식사를 앞두고 서로 돈을 맞추어보니 8만원이 비었다. 나는 십 만원 짜리 수표 한 장과 현금 3만원 해서 13만원을 땄으니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옆에 앉은 중고차 강사장은 잃은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황사장과 십 만원 짜리 퍼팅 내기를 해서 5만원을 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말없는 고수인 황사장은 2만원을 땃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끝으로 남사장은 수표 5장을 가지고 오고, 혹 부족할까봐 골프장 ATM기에서 현금 20만원을 찾았는데 맞추어보니 37만원을 잃었다는 것이다.
내가 딴 돈이 13만원, 중고차 강사장과 친구인 황사장이 합쳐서 7만원. 캐디피로 9만원을 지불했으니 남사장은 29만원을 잃어야 하는데 37만원을 잃었다고 해서 8만원이 비었다. 분위기가 머슥한 상태에서 뒤 늦게 합석한 사람이 핸디받은 사람이 돈을 따면 다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길래 나는 핸디 8만원에 밥값 포함해서 10만원을 주겠다고 하니 37만원 잃었다고 하는 남사장이 괜찮다고 밥먹고 한판하면 된다고 한다. 한술 더 떠서 자기는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 37만원을 잃었다고 하면서 남사장은 400만원을 찾아왔다고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식사 중간 중간에 고스톱 얘기가 나왔지만 나 역시 이쪽 저쪽에서 전화가 와서 고스톱 칠 여유가 없다는 점을 솔솔 피었음에도 일행들이 대놓고 물어보길래 회사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말을 끊었다. 그러자 뒤늦게 합석한 사람이 자기는 라운딩할 때 오후 일정을 다 포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온다고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고, 중고차 강사장도 자기는 고스톱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들 한 판한다면 옆에서 광이라도 팔겠다고 했다.
뭔가 구렸다.
갑자기 아는 사람이라고하면서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고, 한 명은 턱없이 잃었다고 하면서 봉투 속의 400만원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또 다른 한 명은 자기는 고스톱 못치지만 광이나 팔겠다고 하면서 자꾸 맥주를 권하고, 마지막 한 명은 벌거진 나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 어떻게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대충 식사를 하고, 대충 인사를 한 뒤 화장실을 거쳐 혼자 돌아오는 길에 찬찬히 생각해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평베네스트GC와 썬힐GC을 구별 못하고, 그것도 당일 날 장소가 바뀌었다고 알려주고, 라운딩을 시작한 뒤 페어웨이에서 스트록하자고 핸디를 주고, 라운딩 내내 의도적으로 배판을 만들고, 생각대로 잘 안되니까 더블배판도 부르겠다고 하고, 끝나고 식사 장소에서 고스톱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점을 떠올리니 그들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같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같이 라운딩을 하자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순진하게 골프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골프 경력 5년 만에 참 좋은 경험을 했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느낀 라운딩이었다.
만약 당신에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담배를 피우다 혹은 커피를 마시다 누군가 골프 얘기를 하면서 같이 라운딩하자고 하면 당신은 어떨까요? 아니면 여성이 가볍게 스크린 골프라도 하면서 맥주 한 잔하자고 하면? 골프 대신 파크골프라도 한 판 하자고 하면 당신은 뭐라고 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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